서울에 볼일이 있어 간 김에, 짬을 내어 종묘 방문을 했다.
외국인 관광객도 많았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뜻밖에도 해설가 선생님을 따라 다니는 학생들이 꽤 많아, 나도 그 틈에 끼여 유익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종묘의 정문인 외삼문은 궁궐 입구의 문에 비해 소박하다.
종묘(宗廟)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서 국제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유네스코에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종묘는 어떤 곳인가?
조선 왕조의 역대 왕들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국가 최고의 유교사당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바로 짓기 시작하여 1395년에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했다.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는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고대 중국의 도성 계획 원칙을 따라 경복궁의 왼쪽인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니,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정전과 영녕전으로 나뉘며, 그외 다른 부속건물들이 있다.
삼도
종묘에 들어서면 박석을 3단으로 깔아 만든 돌길을 만나는데, 신향로, 어로, 세자로로 구분된다.
신향로는 신이 다니는 길로 제향 때 향로와 축. 폐 등을 들고 가는 길이고,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다.
신분에 따라 차별받은 백성들의 삶이 녹녹하지 않았음이 고달프게 다가와 씁쓸했다.
신향로는 신로와 향로가 합쳐진 말로, 향대청 밖으로 이어져 남북으로 각각 외대문앞과 재궁인 어숙실 일곽을 거쳐 정전과 영녕전으로 이어진다.
향대청
제례에 사용하는 향, 축, 폐를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종묘 향대청은 교육홍보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향대청 내부 앞쪽에 전석이 깔려있는 길은, 향로라 하여 종묘제례 때 향과 축문을 모시는 길로, 존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전석을 깔아 차별을 두었다.
중지당
종묘안에 있는 세 개의 연못 중 하나로, 망묘루 앞에 위치하며 사각형의 못 가운데에 원형의 작은 인공섬이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천원지방'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믿음으로, 섬은 하늘을 상징하고 못은 땅을 상징하는 것이다.
소나무를 심는 궁궐과는 달리, 둥근 인공섬 가운데에 향나무를 심어 종묘가 제례의 공간임을 나타내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망묘루는, 제향때 왕이 머물면서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부쳐진 이름으로, 임금이 잠시 머물던 곳이다.
이 곳의 특이한 점은, 한건물에 누각이 있다는 점과 한지붕이면서 양쪽이 각기 다른 두가지 양식의 지붕모양으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한쪽은 팔작지붕 형태로 지어졌고 사당이 있는 반대쪽은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다 같은 지붕이 아니었나?'
그동안은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지붕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팔작지붕은 의장적인 요소가 강하다. 규모가 크거나 격식을 차릴 때 사용하는 지붕의 형태로 사변에 추녀가 만들어지면서 지붕 측면에 합각이 이루어지는 것이 특색인데, 조선시대 궁궐지붕이 대표적이다.
망묘루의 다른 쪽 지붕은 ㅅ자 형태의 지붕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지붕(건물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으로 박공지붕이라고도 하는데, 박공은 측면의 ㅅ자 부분을 일컫는다.
같은 맞배지붕에도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ㅅ형태의 지붕측면에 풍판이 달린 맞배지붕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높은 격식의 건물에 주로 팔작지붕을 사용하였으며, 맞배지붕은 행랑이나 부속채 등 길고 간단한 건물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산신각이나 혼을 위로하는 사당 건물에는 맞배지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맞배지붕이 더 경건한 느낌을 주나 보다.
앞으로 우리 나라 고유의 건축물을 볼 때면, 어떤 형태의 지붕모양을 하고 있는지 눈여겨 보게 될 것 같다.
망묘루 양쪽 지붕이 달랐던 이유는, 옆에 공민왕 신당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공간에 고려의 왕인 공민당 신당이 있다는 점이 의아했는데, 고려 31대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 태조 이성계의 명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조선 창업의 정당성을 널리 표방하고 고려 유민들을 위함이었다고 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과 준마도가 봉안되어 있다.
어렴풋이나마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고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전사청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례음식을 준비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국내외 관광객을 위해 전사청 마당에 제상을 전시해 놓았다.
일반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제기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모양의 제기가 화려하다.
찬막단
전사청에서 만든 제사 음식을 제상 위에 차리기 전에 검사하던 곳으로, 모든 제물은 이곳에서 정해진 검수과정을 거쳐야만 제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성생위
제례에 올려질 제물인 소,양, 돼지를 검사하던 곳으로 관리가 철저했음을 느끼게 한다.
제정은 향제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 데, 전사청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담장으로 둘렀고, 남쪽에 팔작지붕의 일각문이 있으며
깊이 약 4m에 달하는 우물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찬 게 특별했다는 데, 현재는 물이 하나도 없어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이 우물은 제사에 쓰일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고, 음식을 남자들이 만들었다는 설명을 듣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왜냐하면,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여자들은 제사에 참여하지 못했음은 알고 있었지만 음식까지 여자손을 거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남자들만 제례에 참여하긴 하나, 음식은 여자들이 만들었기에 무척 생소하게 들렸다. 덧붙이면, 종묘제례시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까지도 남자들로만 구성되었음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야말로 엄격하게 여자출입을 제한한 금녀의 공간이었음을 깨닫는다.
요즘이야 악공이나 춤에 여자 구성원이 있지만...
다만 그시절 여성으로써 종묘출입이 가능한 경우는, 죽은 왕비의 혼령이었다니...
남성위주, 신분사회의 차별에 힘이 쭉 빠지며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어숙실은 재궁이라고도 하며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고, 어숙실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요척이라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마침 내가 방문했던 주말에는, 이곳에서 관광객을 위해 간소하나마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었다.
정전
종묘의 중심부분으로 길게 지은 정전의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봉안해야 할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 건물의 규모가 켜져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모셨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서쪽(사진으로는 왼쪽)에서 부터 동쪽(오른쪽)으로 증축된 이 건물은 기둥으로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리 봐도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으로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건축양식으로, 서양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양식이다.
19칸이 옆으로 쭈욱 나열된 문 중에서 손잡이가 있는 문은 가운데 하나 뿐이다.
문이 19칸이라고 해서 방이 19개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가운데 손잡이가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 나머지는 안에서 밖으로 밀어 문을 여는 형태로 갖추어진 정전은, 신위가 모셔진 칸마다 장막으로 구분되었을 뿐, 하나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문을 자세히 보면 문짝이 한결같이 조금씩 맞지 않는다.
첫째는 틈 사이로 혼령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습기가 차는 것을 어느정도 막기 위해 일부러 문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되는데 이뿐만이 아니다.
정전으로 통하는 출입문에도 남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맘대로 드나들지만, 예전에 이 남문은 혼령의 문이었다.
그래서 문에 창살같은 틈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문 또한 어긋나게 만들어 틈을 줬다.
임금을 비롯한 제관들이 드나들었다는 정전의 동문은 서문에 비해 큰 편이다.
동.서.남문의 크기와 모양을 달리하며 의미까지 내포한 조상들의 섬세한 정성에 감탄한다.
동문이나 남문에 비해 작은 크기의 서문이다.
이 서문으로는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들이 출입했다.
정전에서 놓치기 쉬운 곳이 있다.
해설가 선생님을 따라 다니지 않았다면 나 또한 무심히 지나쳤을 정전의 뒷모습이다.
긴 건물만큼이나 뒷벽이 하나로 처리되어 있다는 점과, 창문없는 건물의 측면을 통해 건물이 깊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는 혼령을 모시는 공간의 엄숙함과 아늑함을 잘 보여준다.
또한 밖에서 들어다 볼 수 없을 만큼 높은 담장과 나무로 둘러싸인 건축물의 의미를 되짚어 보노라니 세심한 배려에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바닥에 박석으로 깔아 놓은 이유는, 왕을 비롯하여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는 의미로 빨리 걷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도 담았고, 비가 와도 흙탕물이 튈 염려를 없애며, 전체 바닥을 약간 둥글게 만들어 비가 고이지 않도록 했다.
무엇하나 소홀함없이 의미를 담은 조상의 지혜를 엿볼수 있었던 정전에 도취되어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이 물체에 걸려 잠깐 비틀거렸다.
해설가 선생님에게 물어보긴 했는데, 명칭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용도는 비가 오거나 지나치게 햇볕이 내리쬐면 차양막을 칠 수 있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옛부터 고정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영녕전
이곳은 1421년에 새로 지은 별묘로 건물 이름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두었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가운데 4칸은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중앙의 높은 지붕탓일까?
정전 19칸, 영녕전 16칸, 두 건물을 비교하면 3칸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보기에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드는데, 영녕전이 아담해 보이기까지 하다. 간단한 차이 같은데 두 건물 전체의 느낌이 이토록 다르게 느껴짐이 신기했다.
종묘 건물의 특징은 옆으로 증축했다는 점과, 장식과 기교를 배제한 단순함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위로 올려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요즘 건물과는 대조적이나,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위상과 엄숙함을 느끼게 했다.
나무기둥이 오랜세월을 잘 견뎌내고 있지만 밑둥이 약간 걱정스럽게 보였다. 잘 보존하여 길이길이 물려줘야 할 자랑스런 우리문화유산이다.
현재는 일년에 한번,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제례 행사를 치루며 맥을 잇는 정도지만, 예전에는 제례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요한 일을 알리거나 기원하는 의식이 자주 행해졌다고 한다.
국가적 행사인 만큼 이에 따르는 의식과 의복, 제기의 규격, 제물의 종류, 수 등 매우 엄격하게 규정하고 준수했다고 한다.
현대는 악공뿐만 아니라 음식준비에 여성도 참여하지만, 옛시절에는 어느 한 분야도 여성이 전혀 참여할 수 없는, 그야말로 금녀의 공간으로 조선시대 남성중심으로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추었음을 보여줬던 곳임을 해설가 선생님 덕분에 확실하게 깨달았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신전건축으로, 동양의 '파르테논신전'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는 자부심을 갖게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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