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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교육

남자애만 받던 나, 여제자가 더 좋아진 이유





제가 집에서 초등생 학습도우미로 활동한 지도 꽤 되었나 봅니다. 저보다 작았던 아이들이 성장하여 찾아오는 걸 보면서 새록새록 깨닫습니다.^^
울아들 덕분에 얼떨결에 공부방샘이 되었을 초창기 때에, 저는 남자애들 위주로 받았습니다.
제가 옛 어르신들처럼 남아선호사상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남자형제들 속에 자란 영향탓인지, 여중고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애들의 변덕이나 남을 흉보는 수다 등이 싫었던 저는, 선머슴같은 기질이 있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을 여자애들의 푸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못마땅한 점이 있어 꾸중을 하면 그 자리에서 쿨하게 훌훌 털어버리거나 불만이 있으면 저한테 직접 이야기하는 성격의 애들이 저는 더 좋았기에 남자애들과 잘 통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건 제 착각이었지요. 남자애들 중에도 여자처럼 이야기를 옮기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요^^ 이 소문이 몇달 후 돌고 돌아서 제 귀에 들렸을 때는 심히 실망한 후에야 저의 선입견을 반성했습니다.
이후 여자애들도 받기 시작했고, 성별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러 아이중에 한 아이만 칭찬했다가 오해가 생기는 바람에 난처함을 겪기도 했으나 여자애들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습니다.
스승의 날이라고 방에 풍선으로 장식하고 용돈을 모아 파티를 연답시고 수선을 피우기도 하고, 졸업한 후에 제가 생각난다면서 찾아오는 아이도 남자애들 보다는 여자애들이 더 많았습니다. 남자애들의 변화는 저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아이들 역시 변성기를 겪은 후의 자신을 보이기가 싫은 사춘기를 보내면서 아무래도 여자샘이 불편했을 수도 있다고 이해되었습니다.

얼마전 수능을 끝내고 저를 찾아온 아이도 여제자였습니다. 어린 시절 저를 만나 함께한 세월은 자신의 엄마 다음으로 편한 상대로 만들어 놓았다면서 어떤 점은 엄마한테는 못하는 이야기도 털어놓을 만큼 편하게 대해주니 저는 참 고마웠습니다.
수능끝낸 제자랑 다이어트 정보도 나누고, 19금 영화도 보고, 귀도 뚫게 하고... 나중에 대학진학해서 남친 생겨 고민거리 있을 때 연락하면 조언해준답시고 큰소리도 쳐보고... 선생님이 아닌 나이많은 언니같은 기분에 심취되어 애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음도 좋습니다.

초등생 전문 공부방을 하다보니, 이맘때면 예비 중학생이 되는 6학년과의 이별을 하는 시기입니다. 기말고사를 끝으로 6학년을 떠나보내면서 금년에도 식사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여자애가 슬그머니 편지봉투를 내밀며 집에 가서 읽으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자신도 며칠전에 찾아왔던 언니들처럼 공부열심히 해서 꼭 찾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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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쌤!
마지막이라고 하하 글씨가 엉망이지만 그냥 편지를 씁니다
솔직히 저는 쌤이 편지를 읽으시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시길 바라면서(?) 쓰지만 하하하... 웃으시는 게 더 나으실거예요
저는 공부방에 다니면서 성적도 많이 올랐어요. 그리고 또 생각도 올랐어요(?) 히히힝
선생님이... 어... 목요일날 좋은 선생님 만나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선생님이 나쁜선생님이 아니시라고 생각해요. 충분히 좋으신 선생님 같아요. 착한 선생님이 아니셔도 좋은 선생님 말이에요.
선생님은! 제 2의 엄마 같으신 선생님입니다! 나중에 꼭 놀러갈게요. 성공해서 또 놀러 갈게요. 그리고 저도 선생님처럼  뭘 잘 만들었음 좋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헤헤헤헹

2010 12 OO올림

※그리고 주머니 너무 마음에 들어요.



위의 편지는 울공부방 아이가 떠나면서 제 손에 쥐어 준 편지입니다.
아이가 말하는 성공이란^^ 뭐 거창한 게 아닙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한다는 뜻입니다.
매년 이맘때면 겪는 일이라 이젠 감동 받는 것에 좀 둔해지려고 합니다만 그래도 가슴 한켠이 짠하고 뭉클해짐은, 저 비록 착한 선생님은 아닐지언정 나쁜 선생님이 아닌, 좋은 선생님으로 여겨준다니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 도움을 받는 동안은 서로 솔직한 표현으로 심리전을 벌이느라 안좋은 감정을 드러내며 얼굴 붉혔음에도 불구하고, 졸업때가 되면 중학생은 왜 안가르치냐는 질문을 하며 미련과 아쉬움을 남기는 아이의 마음도 고마워 표나지 않게 코끝이 찡함을 느낍니다.
이 편지를 쓴 주인공의 바람대로 감동을 먹습니다.

우리 학창시절 선생님께서는 남제자들이 더 많이 찾아오더라는 경험담을 들려주셨는데, 제 경우는 공교육과 사교육의 다른 성격탓인지 여제자들이 더 찾아주는 고마움을 맛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