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TV

파사VS밀양, 유괴범을 용서할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주님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듯이 우리도 끝까지 용서하기를 바라는 주님의 뜻에 따라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리하여 용서의 기적을 체험해 보라....』

나에게 해코지 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라야 가능할까?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불가능할 것을 미리 알고 이 같은 뜻을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용서!
그야말로 기적이다. 내 자식을 유괴하고 살해한 원수를 과연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교회에 다니고 성경말씀에 의지하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서와 사랑부분에 있어서 취약하고 자유롭지 못하다.
용서?
용서는 우리의 몫이 아닌, 신의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 '파괴된 사나이(파사)'를 보는 동안 전도연 주연의 '밀양'이 자꾸만 겹쳐졌다.
파사에서 유괴된 아이의 아빠 주영수(김명민)는 목사며 엄마(박주미)는 사모다. 아빠는 딸의 유괴사건을 겪으며 유괴범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갈등하다가 결국에 목사직을 그만두고 딸이 실종된 지 8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미 포기한 상태로 살아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와는 달리 엄마 민경(박주미)은 딸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신념으로 실종아동 찾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믿음을 저버린 남편을 안타까워한다. 8년 후 민경의 믿음대로 딸은 살아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이 사실을 모른채 민경은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종교인으로써 유괴범에 대한 민경의 생각은 알 수 없어 아쉬웠지만, 영화 '밀양'이 떠올랐던 이유는,
엄마인 점
아이가 유괴당함
시차적으로 다르긴 해도 같은 종교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밀양'에서는 아들이 어느날 유괴되고 주검으로 발견된다. 남편을 잃고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던 신애(전도연)는 살아갈 힘을 잃고 만다. 범인이 잡혔지만 죽은 아들이 살아오지 않는 한 용서는 불가능하다. 하루하루 삶이 허무하고 가슴에 박힌 아픔이 신애를 괴롭힌다. 아들을 유괴범에 의해 잃은 후 방황중이었던 신애는 교회 부흥회에 이끌려 그곳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아픔을 토해낸다.
이후 교회 신자가 된 신애는 교회활동에 열심이었고 종교적으로 사랑과 용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유괴범을 용서해야겠다는 순종적 믿음으로 성장한 신애는,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범인을 면회가서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라고 뜻을 전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위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내 몸이 감전된 듯 찌릿했던 순간이다.
이에 그 범인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 너무 놀랐다. 피해를 입은 신애가 이제사 범인을 용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전달하려고 먼길을 왔는데... 범인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이에 신애는 분노하며... 피해자인 자신이 이제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있느냐는 반문을 하면서 아픔을 더 느끼며 충격을 받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종교적인 해석과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면이 많음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신애가 찾아오기 전에 범인은 이미 하나님을 믿었고 기도로써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으므로 스스로 이미 용서받은 자가 된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같은 신앙인으로써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신애는 교회일을 방해하기 시작하는데... 예배드리는 가정의 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뜨리기도 하고, 야외부흥회가 열리고 있는 장소에 가서는 '거짓말'이라는 노래를 크게 털어놓기도 하고...
신앙적으로 위로를 받으려 했던 신애는 오히려 크게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신애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피의자는 법에 의해 죄값을 치루므로 잘못이 상쇄된다고 믿고 싶겠지만, 피해자는 그렇지 않다. 그 악몽같은 아픔이, 그 상처가, 평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용서의 기적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는 걸까?
분노. 미움. 이같은 감정은 삶에 보탬이 되지 못하므로 상대를 용서하므로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얻어 정신적 건강을 되찾으라는 뜻을 담았단 말인가... 정말 힘든 일이다.

두 모정은 닮아있다. 자식을 찾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는 않은 신념과 인내.
그러나 같은 종교인으로써 유괴범에 대한 감정은 어땠는지 알수 없다. 파사의 아이엄마는 아이의 생사확인에 앞서 죽었기 때문에.
이점에서는 목사였던 주영수와 신애의 감성이 비슷했던 거 같다. 행할 수 없는 용서에 대한 분노와 모순으로 인해 이론적인 신앙을 수용할 수 없었던 점이.

종교는 사람을 보고 믿는 게 아니다. 경전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고 따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종교인에게 당하는 피해로 말미암아 충격을 받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그 종교를 떠나게 되는 사례를 종종 볼수 있다. 나 또한 같은 종교인으로 절친했던 사람에게 황당한 사건을 겪음으로 아픔으로 휘청거린 세월을 경험했기 때문에 신애처럼 영수처럼 종교에 회의를 느끼고 외면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믿었던 게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후 내가 덜 힘들기 위해서 용서의 부분은 내가 아닌, 신의 몫으로 돌리고 살아간다.
내가 용서를 했건 안했건 간에 나에게 피해를 입힌 자가 스스로 구원을 얻었고 기도하므로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나도 신애처럼 배신감을 느낄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부딪히지 않는게 상책이라고 여기며, 나는 용서와 사랑을 구하는 기도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내 기억속에 자리잡은 그 일이 망각으로 잊혀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더 하게 된다. 많은 세월과 함께 희석되긴 했으나 그래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미움과 원망, 그리고 분노가 사라지지 않아 아주 가끔 괴롭고 힘들어하며 아픔을 경험한다.

신앙이 성숙된 신자라면, 자식을 유괴하여 목숨까지 앗아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정말...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