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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생각

눈물로 쓴 편지들고 시어머니 산소찾아간 사연


가까운 거리에 친정이 있었다면 조르르 달려가 나도 홀로 계신 엄마한테 멋지게 한상 차려드리고 싶고 수다를 떨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저 마음일 뿐... 한번도 실천하지 못한 못난 딸이다.
어버이 날~ 이 다가오면 내가 하는 일은, 전날에 형님내외분과 울친정엄마한테 통장으로 입금해 드린 후 전화로 안부하는 것으로 어버이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되새기다 가슴앓이로 마무리하는 것이 고작이다. 예전에는 선물을 고른답시고 고민도 많이 했건만 용돈이 더 좋으시다는 말씀에 방법이 바뀌었다.
울남편은 조실부모하여 형님내외분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이런 남편의 처지를 고려하다보니 어버이 날이라고 해서 친정부모님을 따로 찾아뵙는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그렇다고 형님내외분까지 직접적으로 찾아뵙고 챙기기엔 신혼때 겪은 동서시집살이의 심적고통이 너무 심했기에 친정엄마의 양해를 구한 후 나 스스로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변명같지만 엄마가 해주신 말씀에 기대어 스스로 위로한다.
 '효도가 뭐 별건가? 무탈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이면 되는 거지.'

금년에는 엄마랑 통화를 마친 후, 내 나이 쉰을 깨달으며 신혼때의 일이 생각나 울컥했다.
아랫동서를 맞기 전(약 3년간)까지 나는 울형님의 정신적인 동서시집살이에 시달리며 심적으로 몹시 힘든 나날을 눈물로 보내다 아이엄마가 되었다. 첫아이낳고 맞은 어버이 날은 여느때와 무척 다르게 느껴졌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입장인데도 계속된 형님의 심적인 압박감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이혼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끓어오르는 설움에 북받혀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눈물이 마른 후 읽어보니 신세한탄에 가까운 편지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사진으로만 뵌 시어머니에게.
모르는 사람은 그런다. 고부간의 갈등, 그러니까 시집살이가 매섭다고... 하지만 나는 시어머니시집살이는 이론적으로만 알 뿐 잘 모른다. 대신에 내가 겪은 동서시집살이도 꽤 매섭다는 것을 알 뿐이다. 주변 어르신들이 하는 옛말을 인용하면, 시어머니시집살이는 사랑이지만, 동서시집살이는 질투라는 표현이 있단다.
그래서였을까? 울남편 6살때 돌아가셨다는 시어머니를 사진으로만 뵈었을 뿐인데도, 형님이 만들어낸 오해의 질타를 들을 때면 나는 차라리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더 좋겠다고 속으로 되내면서 시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곤 했다.
 
밤새 눈물범벅이 되어 쓴 편지를 챙긴 후, 아이를 업고서 시어머니산소를 찾아갔다. 시내와 가까와서 찾아가기가 참 좋았었는데 몇년 뒤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어머니 산소는 사라졌고 나는 몹시 아쉬워했다. 5개월 된 아들을 내려놓고 연기자가 대사를 하듯이 혼잣말로 떠들었다.
 '어머니, 당신의 손자입니다. 친척들이 아버님을 많이 빼 닮았다고 하더군요...'
하면서 아들을 소개한 후에 편지를 읽으며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어머니 산소앞에서 편지를 태웠다. 내가 이 같은 의식을 치른 것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는 시어머니께서 내처지를 불쌍히 여겨 하루라도 빨리 형님이 가하는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는 그 당시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절박했다. 남편은 항상 일로 바빴고, 객지로 시집 온 나는 아는 사람도 없었기에 믿고 하소연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차라리 남편과의 갈등으로 이혼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쉽게 결론이 났을수도 있지만, 형님이 주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남편과 헤어질까? 를 놓고 고민을 반복했던 그 시기엔 얼른 세월이 흘러 내 나이 쉰이 되기를 바랐던 일이 생각나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눈물이 났던 것이다. 지금은 울형님 많이 달라져 감사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울시어머니 살아 계셨다면, 나는 어머니에게 어떤 며느리였을까?'

내가 한번도 뵌적없는 시어머니께 편지를 쓴 다음, 산소에 찾아가서 엉엉 울었다는 일은 이 자리를 빌어 처음으로 고백한다. 내 나이 쉰살에 맞는 어버이 날로, 억지쓰는 형님의 시집살이를 잘 참고 살아낸 내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