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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생각

고려 도읍지 개성을 다녀온 듯한 간접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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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함께하는 아이중에 지난 연휴때, 부모님을 따라 북한의 개성에 다녀온 아이가 있습니다. 개성에 있는 고려문화재를 하루만에 돌아보고 우리 나라로 돌아왔다는 게 신기한 느낌마저 든다는 저와는 다르게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휴일을 이용한 이런 기회가 있다는 정보를 몰랐던 제가 무척 부러워했더니 담아온 사진 몇장 건네주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제 블로그에 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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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박물관(고려성균관)
이곳은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 992년 국자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되었으나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구분하기 위해 '고려 성균관'으로 부르고 있는 이곳은 1988년부터 고려시대 유물을 한데 모은 고려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곳이랍니다.
박물관앞에 서있는 우람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성균관과 나이를 같이하는 천연기념물로 보존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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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박물관 야외에 있는 현화사칠층석탑 안내돌입니다. 돌에 적힌 빨간색 글자가 이색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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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고려시대 문화재로 꼭 등장하는 현화사칠층석탑입니다.
비슷해 보이는 석탑같아도 따져보면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입니다. 하단부를 벽돌로 쌓은 것처럼 반듯해 보이는 특징이 있군요. 얼룩인지? 금이 간 것인지? 잘 모르지만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고 하네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 조상들은 3층, 5층 7층... 홀수를 좋아함은 석탑을 통해서도 엿볼수 있네요. 그리고 후손인 우리 아낙들도 착실하게 본받아 뜻을 같이하는 모임회원을 모을 때도 홀수로 실천하구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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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의문이 생기던 그 장소. 바로 '선죽교'입니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다가 그의 아들 이방원에게 철퇴를 맞아 숨진 곳으로 알려진 이곳의 본래 이름은 선지교였다고 합니다. 정몽주가 살해 당한뒤 그의 선혈이 얼룩진 자리에 대나무가 피어났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며, 1780년 정조4년 정몽주 선생의 후손인 개성유수 정호인이 다리를 밟고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다리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여 다리의 기능은 상실했고, 옆에 덧댄 돌다리로 건너 다니도록 별교를 세워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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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혈자국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쇠의 녹물처럼 보이더라고 아이의 엄마가 전했습니다.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러한 흔적이 남아있다니 보면서도 진짠가? 가짠가? 의문이 들더랍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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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비입니다.
표충각안에 있는 이 표충비는 고려 왕조의 절개를 지킨 정몽주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조선의 임금인 영조와 고종이 각각 세운 비로, 표충비는 암.수 돌거북위에 새겨져 있으며 예로 부터 돌거북을 만지면 자식을 낳는데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는데 관광객들 사이에 좋은 일이 생긴다며 너도 나도 돌거북의 코를 하도 만져서 윤이 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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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폭포 중 하나랍니다. 웅장한 화강암 암벽에 걸쳐 폭포수가 떨어지며 절경을 이룬다는데... 가뭄탓인지 절벽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가늘고 힘없이 보여서 아이는 좀 실망스러웠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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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의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 생긴 못으로 이 박연에 담겼다가 떨어진다 하여 박연폭포라고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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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위에 빨갛게 물들고 있는 단풍이 보입니다.(10월 3일에 다녀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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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가 폭포의 절경에 감탄하여 머리채를 붓삼아 써내려갔다고 알려진 시가 새겨진 용바위입니다.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사실일까? 지어낸 이야기일까? 아리송한 의문이 드는 야그들이 가끔 등장하는데 이 바위 글씨도 그중 하나.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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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양서원은 고려의 학자인 정몽주가 살던 집터에 문충당이란 이름으로 세워져(1573년) 정몽주와 서경덕의 위패를 모셨다가 1575년에 '숭양'이란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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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양서원은 임진왜란 이전의 목조건물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겨진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일만큼 유서깊은 곳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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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그다지 높이 평가하는 인물은 아닌가 봅니다.
지나간 역사속의 인물로 조선시대 양반들이야 정몽주의 절개를 따라 배워 나라에 충성하라고 표충비도 세웠지만 우리는 특별히 존경하진 않습니다. 인민을 위해 특별히 한 것도 없고 선죽교에 피가 남아 있다지만 사실 불그스름한 바위죠.

인민을 위해 특별히 한것도 없고... ㅎㅎㅎ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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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학생도서관 건물이군요. 개성시의 건물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무채색 건물로 그 분위기가 우리 나라 70년대 영화를 찍는 세트장에 있는 건물과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왼쪽에 높은 건물이 보이는데 개성에 있는 고층아파트랍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말에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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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차려입은 안내원의 친절함이 좋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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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의사항을 숙지하느라 긴장되더라는 아이의 엄마소감과는 달리 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서 세대차이를 확실하게 느꼈습니다.ㅎㅎ

고려 500년 역사가 살아 숨쉬는 개성...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북측도시로써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랍니다.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우리가 꿈꾸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도로에 서있는 나무 전봇대모습과 북한어린이 모습이 마음한켠에 긴 여운을 남기더라는 간단하고 짧은 소감만 밝히며 간접경험을 마칩니다. 보고 느낀 솔직한 심정의 소감을 글로 다 표현하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제게도 직접 다녀 올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