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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생각

풍수지리학상 계획적으로 건설된 조선의 신도시 '화성'



벼르고 벼르다가 마침내 가보게 된 화성!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여유롭게 둘러보려고 했건만...
수원에서 운행되는 시티투어버스는 서울이나 부산과는 달리 오전, 오후 각 한대씩 운행하며 타고 간 사람이 다함께 움직여야하는 시간제한이 있어서 제가 보고자했던 성문을 다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화성』하면
정조가 불운의 생을 살다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며 그 당시에 심각했던 당쟁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뜻을 담아 지은 성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기행을 통하여 가이드의 설명에 의해 추가로 더 알게 된 것은 요즘말로 표현하면 조선시대 한양근처의 신도시같은 개념으로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정조가 낳은 아이가 불운함을 한탄하며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 첨 듣는 생소한 사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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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은 한양 남쪽의 국방요새로도 활용하기 위한 뜻을 담았기에 성벽과 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유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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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이 도는 윗부분은 복원된 벽이고 아래로 까만 돌이 섞여 있는 돌로 쌓은 성벽은 옛모습 그대로라고 우리일행을 안내한 가이드께서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고 애정이 가는 성벽이라고 소개했는데... 저는 돌로 쌓은 성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쿨이 있어서 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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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일부가 된 팔달산에 위치한 ◈ 서포루입니다.
함께 탄 버스일행중에는 방학을 맞아 과제물을 하려고 부모님따라 나선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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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담장같지만 일명 개구멍(?) 같은 비밀문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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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암문
적에게는 띄지 않는 비밀의 문은 옆으로 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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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는 공식적인 문이 네개(팔달문, 창룡문, 장안문, 화서문)있는데 알려진 이 네개의 문이 아닌 비공식적인 문 5개 중 하나입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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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문을 통과하여 가장 먼저 간 곳이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노대와 서장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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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노대는 적의 침입을 살피는 전망대역할을 하는 곳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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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장대
지난번에 화재가 있었다는 건물이 이 서장대며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앞에 꽂혀있는 깃발색깔에 따라 평지에 건설된 화성행궁에 현재 누가 계신지 알림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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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대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로 2층 누각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정조가 화산 능 참배시 이곳에 방문하여 직접 군사를 지휘하였다고 합니다.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부족해서 겉모습만 보고 돌아섰습니다. 이곳 정자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더위를 식히고 있었습니다. 장화신은 이 꼬마숙녀는 우리가 탄 버스의 일행으로 가장 어린 승객입니다. 이 꼬마숙녀도 바쁜 시간임을 알았던지 장화벗을 시간이 없었나 봅니다.ㅎㅎㅎ
저보다 동작이 빨랐네요. 요기까정 올라가보고... 저는 사진찍느라고 시간이 많이 부족했는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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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대 앞 소나무숲사이로 조오기 아래에 행궁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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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루/서암문의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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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종의 종
팔달산 정상에 있는 종으로 유형 문화재 제69호인 팔달산 동종이 300여 년이 경과하여 낡았을 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작고 소리가 탁하여 울림이 없어 더 이상 타종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러, 1991년 11월 4일 주조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1여 년만에 완성하였답니다.
「효원의 종」이라는 이름은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해졌으며 이 이름에는 수원 시민들에게 효행심을 심어주고 영원한 화합과 진전을 다지는 한편, 선진 시민상을 구현함으로써, 온 시민이 한마음을 이루는 구심점으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답니다.
종의 전면에는 시의 상징물인, 은행나무, 철쭉, 비둘기 등과, 화홍문을 위시한 수원화성의 주요 문화재 등이 새겨져 있고 구경 2.15 m, 높이 3.54 m, 총 중량 3,300관(약 12.5톤)에 이르는 대형종입니다.

1타 : 부모의 건강을 기원
2타 : 가족의 건강을 기원
3타 : 나 자신의 발전을 기원

종각을 항시 개방하여 관광객이 스스로 타종을 하면서 소원을 빌도록 해놓았더군요. 요금을 내고 타종합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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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은 사전 제 3호로 조선조 제 22대 정조대왕 재위시 1974년 1월에 착공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축성시 48개 시설물이 있었으나 시가지 조성, 전란 등으로 인하여 일부 소멸되고 41개 시설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신청되어 1997년 12월 유네스코 총회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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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풀잎과 더불어 보는 성벽이 참 고즈넉합니다. 모퉁이 어딘가에 앉아서 여유로움을 부리고 싶을 정도로...

우리일행을 태울 버스가 기다리는 지점으로 열심히 뛰어갔습니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들이긴 하나 단체행동에서 눈밖에 나면 안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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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성벽에 있는 네개의 문은 가까이서 제대로 본 것이 없고, 화성안의 문을 그나마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 문은 화성안에 있는 북수문으로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습니다.

◈ 화홍문
화성을 관통하는 수원천의 북쪽수문으로 일명 북수문이라고도 하며 석교로 7개의 홍예수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지개문 위에 단층의 누각을 세웠고 수문 아래로 쏟아지는 물보라는 화홍관창이라 하여 수원팔경 중 하나도 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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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천이 범람함을 방지하기 위해서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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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옆에 자리잡은 방화수류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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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암문에서 바라본 방화수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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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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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수류정/동북각루라고도 합니다.
누각 형태의 건물로써 주변을 감시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고, 용연, 화홍문과 어우러져 수려한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조가 이 누각을 만든 사람을 불러 크게 칭찬하며 잔치를 열어줄 정도로 아름답게 잘 지었음에 흡족하였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배경으로 동영상을 담고 있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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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화성내를 달리는 화성열차가 운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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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암문
동북각루(방화수류정)의 동쪽에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으며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은 비밀의 문이랍니다.
서암문과 달리 앞이 개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문 앞에는 뽕나무와 (?)나무, 두가지 나무를 심어 울창하게 해서 적이 모르도록 가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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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으며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어져 있는데 지세를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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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못을 ◈ 용연 이라고 하는데 방화수류정에서 내려다 보면 참 아름다웠을 것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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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암문이 있는 성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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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을 ◈ 연무대 혹은 동장대라고 합니다.
장수가 산성을 지킬 때에 올라가서 지휘할 수 있도록 높게 만든 동쪽의 대로 서노대와 같은 개념이지만 연무대는 화성 시설물 중 가장 위용이 있고 평상시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장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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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쓰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연병장의 지휘본부이며 건물밖에는 조련장을 닦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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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대서 바라본 넓게 펼쳐진 활쏘기 체험장인 국궁장입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시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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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일 주말을 이용하면 체험하는 시간이 더 주어지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공연도 있다고 하는데... 평일인지라 무예공연의 볼거리도 없었고 궁중옷을 입고 사진찍는 것도 생략되었고, 아이들이 직접 해보는 활쏘기 시간도 훨씬 단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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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활쏘기는 힘이 무척 들어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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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활쏘기를 아주 잘하였다고 하는데 신하들과 활쏘기를 할때면 겸손의 의미로 10대를 쏘면 한방은 맞히지 않았다고 하네요. 10대를 다 꽂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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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 너머로 보이는 것이 ◈ 동북공심돈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러 작은문을 설치하면서 온돌 한 간을 지어 놓았는데 방안(方眼)을 창으로 삼아 군사들이 출입하게 하였답니다.


★ 조선시대 계획적으로 건설한 신도시

축성 당시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수원 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왕 정조가 선왕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서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풍수지리학상 명당 자리인 화산으로 이전하고 그 부근 주민들을 팔달산 아래 현재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한 수도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당쟁이 극심했던 정세를 쇄신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로 건설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극진한 효심을 기반으로 군사, 정치, 행정적 목적까지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화성의 건설에 당대 동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성과가 총결집되었고,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 번암 채재공과 실학의 거두 정약용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화성은 근대 초기 성곽건축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지식in 참고


화성의 네개문은 투어버스를 타고 지나치면서 보았기에 담을 수가 없어서 참 아쉬웠고 성주변에 주민들이 옮겨와 살면서 발달한 시장의 모습도 볼수 없어서 제대로 느끼기에는 역시 부족했습니다.
수원화성은 지난달에 다녀왔지만 정리가 늦은 관계로 이제사 올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