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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

사대부집 99칸 한옥의 진수를 간직한 선교장

 

 

학창시절 추억이 서린 강릉 경포대와 오죽헌엘 몇 해전에 다녀오면서, 시간에 쫓겨 선교장 방문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되어 둘러볼 수 있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으로 왔을 때도 버스로 지나치기만 했던 곳이라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음은, 말로만 듣던 99칸의 한옥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멋진 풍광을 고스란히 품은 선교장 터는 하늘이 족제비 떼를 통하여 점지했다는 명당임을 증명하듯, 선교장을 병풍처럼 감싼 노송들이 기품을 더한다. 이 멋진 전경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왜 택호를 선교장이라 명명했을까?

예전에는 강릉 경포호가 선교장 아래까지 닿았다고 한다. 선교장 왕래를 위해서 경포호를 가로질러 배와 배를 붙인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하여 배선(船) 다리교(橋) '선교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경포호의 물길따라 집 앞까지 배가 드나들었고 출렁이는 물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위치의 집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멋진 경관이 떠올라 감탄하게 된다.

 

선교장은 누가 지었나?

선교장은 조선시대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이었던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진 건물로, 10대에 이르도록 증축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선교장의 주인은 강릉 고을의 만석꾼이었고 인심이 후해서, 흉년이 들면 곡식을 내어 백성들을 살렸고, 강릉을 찾는 선비들을 위해서는 숙식을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선교장 신세를 진 문인들은 감사의 표시로 좋은 글귀나 그림 등을 남겼고, 그들이 남긴 다양한 분야의 예술품은 선교장에 보관되어 있다.

 

99칸 전통한옥의 진수를 품은 선교장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위치한 선교장은 사대부의 상류 주택으로서, 99칸이라는 규모만으로도 놀라운데 화려하지 않은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이 소박하게 녹아있다. 선교장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으로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개인소유의 국가 문화재란 점과 사유재산인 집이 관광상품이 된 점이 참 특이하다.

개인 소유인 탓인지 입장료가 좀 비싸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른 3,000원.

안채, 사랑채, 별당, 가묘와 집 앞의 정자까지 옛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선교장은, 개방적인 남방형 가옥과, 추위를 막는 북방형 가옥의 특성을 고루 갖춘 특별한 모습으로 조선시대 민간가옥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선교장의 구조

길게 이어지는 행랑채 중간엔 ‘선교유거’라는 현판을 두른 솟을대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안채가 있다. 별당 건물과 함께 그 모습을 단단히 감추듯 ‘ㅁ’자 형태로 지어졌으며, 왼편에는 이색적인 차양을 두른 사랑채 건물인 열화당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가 큰 선교장엔 대문도 많은데 그 중에서 첫번째 대문인 선교장으로 들어가는 월하문.

대문 기둥에 붙어있는 현판의 글귀에는, '새는 연못과 나무에서 잠자고, 나그네는 월하문을 두드린다.'- 강릉을 찾은 선비들은 누구나 이 문을 두드리면 숙식을 제공 받을 수 있었다고 하니 주인장의 넉넉한 인심이 존경스럽다.

대문안에 돌의자 같은 게 두개 보인다. 이름하여 하마석.

선비가 말에서 내릴 때 디뎠던 디딤돌을 일컫는다. 선교장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많아서 넓은 하마석이 2개씩 필요했단다.

 

 

활래정

선교장에 들어서면, 연못과 땅을 반반씩 차지하고 지어진 누각을 보게 된다.

겨울에도 숙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온돌을 설치해 군불을 넣을 수 있게 지어졌다고 한다. 연못 중앙에 작은 섬위에 자라는 소나무도 일부러 분재한 것처럼 참 멋지다.

1916년에 건립한 활래정은 언제나 살아 있는 새로운 기운이 들어와서 선교장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어졌다고 한다. 물 위에 떠 있는 누마루와 온돌방, 다실이 있어서 근대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과 조경미를 맘껏 뽐내는 활래정은 한국 민가정원 정자의 극치를 이루는 곳이다.

 

 

물이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뜻으로 지어진 활래정(活來亭).

그래서일까? 관동팔경을 지나는 많은 풍류객들이 이곳을 찾았고 또한 많은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방문객들의 다도체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랑채로 통하는 솟을대문

일자형으로 길게 지어진 건물 정면에는 사랑채로 통하는 대문과 안채로 통하는 대문이 따로 만들어져 있다. 사랑채는 남자들만의 공간이니 그 시절엔 마땅히 남자들만 드나드는 문이었다. 입구바닥이 계단이 아니라 돌로 만들어진 경사로 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옛시절에 장애인을 위한 배려차원은 아니었을 테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말을 탄 채로 사랑채 안으로 들어오는 선비를 위해 만든 경사면이라고 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있는 우물.

이 우물은 집안에 큰 잔치가 있을 때 사용하였고, 평소에 쓰는 우물은 건물 안에 있었다고 한다. 비가 오면 물이 늘었고 가물면 물도 줄었다고 한다.  

 

 

사랑채 대문 옆에는 안채로 통하는 여자들만의 안채 대문이 따로 있다.

사랑채 입구 바닥이 경사면이었던 것과는 달리, 안채 대문 입구는 계단으로 되어 있다.

 

 

안채 대문 옆 오른쪽 건물은 분리된 듯 또 다른 대문이 보이는 외별당이다.

외별당은 맏아들의 신혼살림 집으로, 혹은 작은 아들의 분가 이전의 거처로, 혹은 손자들 거처로 사용되던 곳이다.

 

 

 

현재는 후손들이 내실로 사용하고 있는 외별당 마당에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장독들이 질서있게 놓여있어 인상적이다.

 

 

밖에서 보면 긴 일자형 건물이지만 내부에 들어서면 다양한 건물이 남녀공간을 달리하여 구분지어 놓을 것을 볼 수 있다. 99칸의 한옥에는 크고 작은 12대문이 있다.

유교사상을 철저하게 따랐던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통해 남녀구별짓기를 매우 철저하게 했음을 엿볼 수 있는데, 출입하는 대문과 더불어 대문의 방향까지도 엄격하게 구분했다는 설명을 듣노라니 소름이 끼쳤다. 여성보호차원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남성들의 권위의식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교장에서는 남녀가 사용하는 대문은 따로 정해 놓았으나, 방향은 동일하게 한 점이 특별하다. 좋게 해석하면 이곳의 여성들은 조금이나마 존중받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지면에서 떨어진 특이한 문지방

사랑채로 통하는 대문 안채의 문턱은 대부분 초승달 혹은 그믐달 모양처럼 생겼고, 지면에서 떨어져 있다. 이는 해가 지면 안채의 대문을 일찍 잠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므로써 밖에 나가 있던 개나 고양이같은 짐승이 문지방 아래로 드나들 수 있게 한 이유라고 한다.

옛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녀 성별과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짓던 조선 사회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어쩔 수없는 차선책으로 여겨져 씁쓸하기도 했다.

 

 

안채 주옥

안방마님과 여인들의 거처로 선교장 300년 최초로 지은 건물이다.

 

 

서별당

이씨가의 서고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집안의 안채 노마님을 위해 돌을 쌓아 경사면을 만들어 놓은 길을 대할 때는 또 다시 지혜와 멋을 느끼게 된다.

 

 

연지당

서별당 전면의 건물로 집안 일을 도와주던 여인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앞 마당은 안채로 들어가는 곡물과 재물 등을 확인하며 받을 때 사용하던 곳으로 받재마당이라고 한다.

 

 

동별당

안채 동쪽의 별채로 안채 부속 건물이다. 이곳은 집안 잔치나 손님맞이에 집안 손님들의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다.

계단 위 건물 가운데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군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가 있다고 한다. 이 작은 문을 통해 하인이 들어가 군불을 지폈다고 하는데, 연기에 코가 매웠을 하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처사라고 생각된다.

문지방을 만들 때는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고려한 듯 인정을 베풀었으나, 같은 사람인 하인에 대한 배려는 외면한 듯한 처사가, 신분 사회를 내세운 사대부의 위선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좌측에 즐비한 창문이 많은 건물은 행랑채로, 선교장 모든 건물의 전면에서 통일된 질서감을 느끼게 한다. 지나던 선비와 풍류객들이 이곳에서 머물렀고 지금은 체험객의 숙박이 가능한 곳으로써 1박2일 팀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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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사랑은 현재 체험객의 숙소로 활용하고 있다.

 

 

열화당

큰 사랑채로써 이곳은 선교장의 주인 남자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집이라는 뜻의 의미가 매우 좋다.

1815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덧붙여진 차양막이 특이해서 이국적으로 보이는 데, 구한말 러시아 공사관이 한 때 이곳을 찾았을 때 후한 대접을 받은 후 답례로 준 건물이라고 한다. 한옥과 어울리지 못해 어색한 면도 있으나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 그냥 두었다고 하는데, 한옥스타일 속에 러시아스타일이 존재하는 덕수궁에서 본 정관헌과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

 

그리고 집 밖으로 여러 부속건물들이 있다.

 

 

곳간채

만석꾼 선교장의 곳간이었으며, 1908년 영동지방 최초의 사립학교인 동진학교로 개조하여 신학문으로 지역 인재를 양성하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여운형 선생이 설립했다.

현재는 곡식 창고로 쓰던 건물로 복원되어 있다.

 

 

 

최근에는 기왓집과 초가집을 이용한 숙박체험도 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고 한다.

관람객이 퇴장하고 없는 조용한 공간에서 노을을 감상하는 여유도 참 멋질 것 같다. 언젠가 기회가 올 것으로 여기며 선교장을 나섰다.

 

 

 

 

드라마로는 궁, 황진이, 바람의 화원, 공주의 남자 등

영화 : 물레야 물레야, 식객, 대원군 외

방송 : 1박 2일, 외국인 근로자 가족상봉

 

옹기종기 구분지어진 집 구조에서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과 더불어 기품을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