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TV

가끔 '호우시절' 연출하는 우리부부 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호우시절(好雨時節) :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사랑이던 우정이던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코드와 시기가 일치해야만 더 애틋하고 필요한 존재가 됨을 다시금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잘생긴 정우성씨의 부드러움과 청순한 이미지의 고원원씨가 만들어낸 분위기는, 잔잔하고 차분한 전달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설렘을 동반하며 맑다는 느낌을 줍니다.

영화는, 남녀주인공이 함께했던 유학시절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저는 이미 부부가 된지 20여년이 지난 우리 부부가 사는 이야기를 옮기려 합니다.
영화속에 우리부부가 주인공으로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면서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고, 영화관람을 함께 하지 못한 울남편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국으로 출장온 박동하(정우성)는 학창시절에 시인이 될 꿈을 꾸었고, 중국시인 두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니 중국시인 두보를 추억하는 두보초당을 방문하고 싶겠지요. 그곳에서 뜻밖에도 유학시절 사랑했던 여인과 재회를 합니다. 메이(고원원)는 고국으로 돌아와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었는데 설정이긴 하겠지만 두보초당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둘은 데이트를 합니다. 약속한 대로 근무를 마치고 동하앞에 나타난 메이의 모습을 보며 저는 제가 울남편앞에 선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가끔 제가 남편을 불러내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제가 들이대며
"여보, 나 이쁘징^^"
하면서 자찬하는 제 행동과 어쩌면 이리도 닮았는지... 물론 영화속의 메이가 하는 대사랑 다르며, 생김새는 전혀 아닌, 제가 어느새 메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춤을 추는 중국의 문화가 마음에 듭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라면 당연히 저도 남편과 춤을 췄을겁니다. 영화에서는 남자가 청하고 여자가 빼다가 응하지만, 우리부부의 경우는 제가 청하고 울남편이 슬쩍 빼는 척하다가 응해줄 것입니다.
모임을 통해서 노래방에 가면, 춤의 기본도 모르지만 제가 남편을 일으켜 세우고, 집안에서와는 다른 분위기를 즐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자와 여자의 기억이 다릅니다. 키스했다는 남자의 기억과, 전혀 그런일이 없다는 여자를 보며, 관객은 아리송해지지만, 연인이었나 친구였나를 되짚어보는 두사람의 차분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저는 가을에 어울리는 따스한 봄영화같은 느낌이 너무 좋았으며, 저 개인적으로 멋지다고 느낀 대사를 메모했습니다. 살짝 바꿔서 제가 남편한테 사용할려구요.
"네 머리는 기억 못해도, 네 입술은 기억할거야."
동하의 이말에 메이는 당장 키스해보라며 미소를 머금고 얼굴을 치켜들다가 피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애교스럽습니다. 이런 행동 저도 남편앞에서 가끔 합니다.
가끔! 요것이 중요합니다. 가끔!해야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식상해지면 재미없거든요.ㅋㅋ
남편은 항상 같은 감정으로 같은 날이기를 바라지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변덕을 부리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도를 합니다. 때론 무덤덤하게, 때론 아주 격렬하게 , 옥신각신 말도 안되는 일로 시비를 붙어 남편을 화나게 하고,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권태로움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저만. 남편은 항상 똑같으니까요.^^

옛친구를 아니, 옛연인을 만난다는 것은 흥분과 긴장감을 주면서 설레게 될테지요. 이들은 지나간 시절의 추억을 조심스럽게 들추며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싶어합니다.
빠르고, 뜨겁고, 격렬한, 사랑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는내내 무척이나 지루하다고 느껴질수도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는 조용하게 내리는 비와 같고, 바람에 스치는 아쉬움같은 것이 살포시 배여있는 정적인 영화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하에게 2박 3일 출장은 너무 짧습니다. 지사장(김상호)이 '김치찌개에 쇠주한잔'을 함께하자며 볼때마다 간청하지만, 그거 한번 들어줄 시간이 없는 동하... 결국에는 귀국일도 하루 늦추면서 둘은 데이트를 하게 됩니다.
얼마나 설렜을까요? 제가 주인공이 된양 막 떨렸습니다.
공항에 나타난 메이를 보고 귀국을 하루 늦추기로 한 다음, 찾게 된 호텔카운터 장면을 보면서 제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요즘은 나름 자연스럽게 부부티를 내면서 드나들지만^^

신혼여행때는 예약하기 때문에 잘 몰랐고, 결혼 후 처음으로 그것도 아침에ㅎㅎㅎ 모텔을 처음 찾았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사연인즉, 3박4일 일정으로 제가 친구들과 일본관광차 집을 떠날 때였습니다. 제가 사는 고장에는 인천공항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습니다. 인근의 도시로 태워다 주던 울남편이 갑자기 중간에 차를 엉뚱한 곳으로 몰아갔습니다. 그곳이 모텔?
어찌나 민망하던지... 우물쭈물거리던 제가 참 부끄러웠습니다. 세상에 그 시간에 모텔가는 중년의 남녀를 보면 정상적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만 떳떳하면 되지 무슨 상관이냐는 울남편은 무척 급했고, 저는 차시간이 급했습니다... 이후 가끔 우리부부는 낯선 환경에서의 감정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나무숲에서의 포옹과 키스도 우리부부가 연출했던 장면입니다. 몇년전에 떠났던 여행길에서 고창읍성을 찾았습니다. 그곳에 작은 규모지만 대나무숲이 있었고 울남편과 저는 한적한 곳에서 우리부부만의 응큼한 테이트를 즐겼습니다.
맞선으로 이루어진 우리부부에게는 결혼전의 데이트 추억이 없다시피 해서, 아이들이 다 자란 지금에서야, 늙어서 회상하게 될 추억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딸 말을 빌리면 유치하게 짝이 없는 푼수부부로 살고 있는 게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사장 모르게 낮에는 둘만의 데이트를 했는데, 저녁식사를 하려고 들렀던 한국식당에서 지사장과 부딪혀 어쩔수없이 소주잔의 건배가 이어지고... 동하는 안절부절합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지사장은 한잔만 하고 일어서겠다면서도 계속해서 취해갑니다. 동하는 홀짝홀짝 술잔을 비우는 메이에게 술에 취하지 말라며 눈짓을 보냅니다. 가끔 이런 경험하지요.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려고 하는데 눈치없이 끼여드는 사람... 참 밉지요.
쉽사리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자제력을 보이는 메이에게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동하가 실망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메이의 용기와, 지켜야 할 선을 지키려는 노력이 너무 이뻐보였던 영화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랑
분명 때가 있습니다.
미혼의 청춘남녀 사랑뿐만 아니라, 결혼하여 같이 사는 부부에게도 때가 있습니다. 혼자만의 감정으로는 이쁜 사랑을 만들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해야하고, 또한 자신의 감정도 솔직하게 전달해야할 것입니다.

허진호감독의 이전작품 '행복'(이별을 예고한 사랑이지만『행복』했습니다)이 떠올랐습니다. '호우시절'이 행복한 사랑을 예견함으로써, 영화 '행복'의 결말에서 맛보았던 찜찜함에서 벗어나 행복을 느꼈던 영화입니다.
쓰촨지진의 충격으로 지진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메이에게, 동하가 안전지대가 되어 줄 것임을 믿게 되었으며, 이 가을에 파릇파릇한 연인과, 사랑의 신선한 빛을 되새겨보고 싶은 부부가 보면 참 좋을 영화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