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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생각

작은 불빛때문에 간첩으로 의심받은 우리들

20여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가 되지만, 해마다 여름이면 생생하게 떠올려지는 추억이 있습니다.

거슬려 올라가 제가 20대 초반일 때, 여고동창생으로 맺은 모임의 친구 5명이 용감하게 우리들만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 행로는 친구의 남친이 아닌, 친구의 친구가 사귀고 있다는 남친이 군복무중이라는 동해안으로...^^
젊은 여인들끼리 외박을 겸한 여행을 한다니 각자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가 여간 힘든 시절이 아니었지만, 우리 다섯명의 칼날같은 별난 성격(?)을 아시는 부모님께서 흔쾌히 승낙해 주셨습니다.

보호자없이 떠나는 첫여행이었으므로 나름대로 보호장치를 한다는 것이, 군복무중인 남친에게 의지한다는 것이었다니... 참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어이없고 황당한 경우지만, 군인아저씨라면 우리를 지켜줄것이라는 신뢰감때문이었던 거 같습니다.
군인남친은 동해안 바닷가 초소에 근무하기 때문에 좋은 자리에 텐트를 치도록 도와주겠다는 것과, 혹시모를 위험(?)에서 보호도 받을수 있겠다는 판단을 우리 나름대로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럼 군복무중인 남자의 얼굴은 아느냐? 아뇨. 아무도 모르고 이름과 계급만 알고 찾아갔습니다. 한창 붐비는 8월초를 비껴 약간 한산한 때를 고른다고 골라 8월 중하순쯤에^^

그때만 해도 누가 승용차를 가질 여건도 아니었고, 무거운 베낭을 어깨에 나누어매고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강원도 모 동해안을 찾아갔습니다. 여친에게서 미리 연락을 받은 그 군인남친이 우리를 반겼고, 그들이 사용하는 방을 우리가 잠깐 빌려서 옷을 갈아입은 후 한산한(?) 바닷가에서 밥도 해먹고 바닷가에 들어가 놀기도 했습니다.
옛날 그곳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집수리하면서 대여섯권의 앨범이 사라지는 바람에 그때의 추억담이 담긴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 없음이 못내 아쉽습니다)

20대 초반의 싱그런 처자들이 친구의 친구 남친을 믿고 떠난 여행지? 장교도 아니었고, 현재 울아들처럼 그저 복무기간을 채우고 제대할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군인일 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에는 순진했고 지혜로운 선택으로 여긴 여행입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으려니까 그 군인남친이 신호를 보냅니다
이제 모래사장에서 나와야할 시간이라고...
알고 보니 그곳 모래사장에는 민간인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었고, 자신이 보초서는 시간이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밤을 맞아 우리일행은 군인들의 숙소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의 잠자리를 우리가 차지할수 없었기에 군인남친이 좋은 자리라고 일러준 육지로 옮겨 텐트를 쳤는데, 지금처럼 텐트촌으로 조성된 널직한 공간이 아니라 도로와 가까운 곳에 나무가 우거졌고 적당하게 빈 공간에 우리들만 있었습니다.
'여자 세명이 모이면 접시를 깬다'할 정도로 수다가 시끄러운데, 두명이 불어난 다섯명이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마는 우리외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깜깜한 밤공간의 자유를 맘껏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친구중에 한명이 어떤 종교를 믿는데, 종교의식을 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텐트밖을 나가 무슨 책을 펴놓고 주문을 외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조용해졌고, 밤에 글씨가 안보이니까 친구는 작은 손전등을 이용하여 불을 밝히고 그 의식을 계속하고 있던 중...
"손들엇!!!"
갑자기 우리 텐트밖에서 명령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텐트안의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우물쭈물거리고 있는데 텐트를 툭툭차면서
"손들고 나왓!!!"
아뿔사 군인아저씨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고 우리는 놀라서 손을 들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
"놀러 오신 숙녀분 같은데 민간인 맞습니까?"
"예."
"손 내려도 좋습니다. 그런데 불빛을 왜 동해쪽으로 비추었습니까?"
"......"
영문을 몰라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왜 불빛을 동해쪽으로 비추었는지 말해 보십시요."
군인아저씨는 자꾸만 다그치고...
"?"
불빛을 동쪽으로 비추었는지 남쪽으로 비추었는지 방향은 모르고, 단지 책을 보기 위한 불빛이었는데 군인아저씨는 방향을 강조하며 묻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저는 방향은 모르고 책을 보기 위해서 불을 비추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은 반공이란 말이 사라졌지만, 우리의 학창시절에는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쪽이나 서쪽의 바다를 이용하여 간첩이 나타났다는 뉴스도 접했던 시절이었으니 동해안에서 동쪽으로, 서해안에서 서쪽으로 불빛을 비추면 무슨 신호(?)로 여기며 간첩으로 오해받는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그같은 교육은 받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군인아저씨가 힘주어 주의를 줍니다.
"이곳에서 동해쪽으로 불빛을 비추시면 간첩으로 오해받는 거 몰랐습니까? 우리는 지금 간첩잡으러 왔습니다. 조심하십시요. 숙녀분들도 놀랐겠지만 우리도 무척 놀라서 출동한 것입니다."
그날밤 우리는 텐트안에서 제대로 잠을 청할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에 간첩이 나타날 수도 있구나...'
막연했지만 이런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동이 터자마자 우린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 군인남친에게 인사도 못하고... 그러나 그 군인남친은 동료를 통해서 우리가 간첩으로 오해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지만, 우리일행을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고 감히 밝힐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동해안에 군복무중이셨던 분들 중에는 얼굴은 모르지만 우리일행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로부터 10여년 후, 함께 여행갔던 친구들이 결혼하여 자녀를 데리고 온가족이 모여 바닷가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그 불빛사건을 상기하면서 바닷가에서는 작은불빛도 방향에 따라 오해받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한다고 아이들에게 전수하며 추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