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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

『단종제향』을 치루고 있는 영월 '장릉'의 모습

어젯밤(25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오늘(26일)도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강원도 영월에서 열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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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문화제'의 하이라이트라 할수 있는 '단종국장 재현'과 더불어 '단종제향'이 올려지는 장릉을 가봐야겠다는 설레임으로 잠을 설치다가 결국에는 늦잠에 취해버린 한심한 출발이 되고 말았습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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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은 조선시대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능으로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이 17세 되던해 죽음을 당하여 동강에 띄워진 주검을 '엄흥도'영월호장이 그 시신을 수습하여 현재의 능이 있는 이곳에 암장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숙종때야 단종이 왕으로 복권되고 단종이 암장된 곳을 찾아내 왕릉으로 정비하게 된 곳입니다.
장릉입구입니다. 10여년전에 한번 아이들과 다녀간 후로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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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도착으로 말미암아 꼭 보고 싶었던 국장재현 행렬은 이미 끝난 후라 등장했던 재현에 동원되었던 도구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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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 참여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만 볼 수 있었습니다. 비가 내린 궂은 날임에도 진행한 행렬인데... 너무너무 아쉬웠고 이 아쉬움은 내년을 기약할 만큼 미련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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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차림의 많은 사람들 모습으로 보아 그 행렬이 참으로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불쌍하게 살다간 어린 임금의 생애를 하늘도 슬피여긴 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애통해하면서 상기하는 날로 부활되었음으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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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의 마당에 마련된 '단종역사관'은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단종의 일대기를 그린 그래픽패널, 생육신과 사육신의 충절을 기린 위패, 조선시대의 형구, 형벌의 종류, 단종어보와 정순왕후 어보, 단종의 유배재현 영상물, 단종유배행렬 디오라마 등의 복층구조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단종일대기를 보노라면 눈물이 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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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의'정려각'입니다.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2년에 어명으로 세운 것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과 비석입니다. 영월호장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던져지자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도받고 받아 순조 33년에 가필하여 같은 해에 또 다시 증축하였으며, 고종때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역사의 심판은 후세에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어린 임금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여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암장할 수 있었던 용기에 머리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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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제향이 열리는 정자각앞의 넓은 잔디밭에서 무언가(늦은 도착으로 설명을 못 들었어요)를 태우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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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제를 올리는 행사의 시작을 알리며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이 정자각을 향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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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제향, 제례악과 육일무

영월군민의 가슴속에 충의(忠義)의 뿌리를 심어놓은 단종제향은 전국에서 유일한
왕 제향과 충신 제향을 함께 하며 2008년 올해로 고유제는 321회, 충신제는 218회를
맞이합니다.
4월 26일 오전 11시, 장릉에서는 강원도립예술단 국악단의 제례악 연주와 정재연구회의
육일무를 추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단종에 대한 고유제가 정중히 모셔집니다.
1950년 6.25 이전에는 능을 관리하는 참봉(종 9품)이 초헌관이 되었으나 참봉제도가
없어지면서 군수가 그 뒤를 이어 제향을 주관하고 있으며 2007년 제관으로는 첫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관에 박선규 영월군수,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에 유창식 정선군수,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관에 권혁승 평창군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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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에서 제향이 치루어집니다.
이 건물은 영조 9년에 건립되었으며 단종의 제향시 제물을 차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한자의 정자와 같다고 하여 정자각으로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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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제를 올릴 사람들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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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안에 준비되어 있는 제상입니다. 이곳에는 방송사의 사진기자나 용기있는(?) 사진작가들이 머물더군요^^ 팔만 뻗어 겨우 한컷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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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무와 함께 제가 올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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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임시로 만들어진 비닐하우스에서 제례악을 연주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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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처로 정순왕후 선발대회로 뽑힌 여인의 뒷모습입니다. 정면을 찍는 분들도 참 많았는데 저는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모델료가 없어서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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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니 이런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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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가량 행해진 제는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해서 저 언덕위에 모셔진 왕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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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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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무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그 자리를 떠났지만 관계자분들 중에 희망자에 의해서도 자유롭게 제를 올리고 있는 동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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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까이에 가지 못하게 말리다가 다 끝나니까 능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하더군요. 단종의 왕릉인 장릉입니다. 다른 왕릉에 비해 소박한 모습으로 애통한 사연을 안고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석물도 다른 능에 비해 하나씩 적게 놓여져 있답니다. 하지만 장릉에서 참배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영월군에서 만든 안내 팜플렛에 소개되어 있더군요^^ (참배하지 않은 저는 참인지 아닌지... 밝힐 수가 없네요. 요 내용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경건한 마음으로 왕에 대한 예로 4배를 올리면서 소원을 빌어보는 건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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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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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제가 지나왔으나 많은 사람들 속에 가려졌던『영천』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영천이라 불리는 이곳은 장릉의 제사를 지내는 우물로 정조 15년에 군수 박기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장릉 제정으로 칭하게 되었습니다. 보통때는 샘이 조금씩 솟았으나 매년 한식 때, 제향을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된다고 합니다. 우물의 구조는 사방이 돌담으로 둘러있고 우물의 깊이는 1.5미터 정도, 화강석으로 정방향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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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을 본 후에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제를 올리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급히 내려갔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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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식단사'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패(位牌)를 모셔놓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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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식단사 맞은편의 배식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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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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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의 수로입니다.
왕릉 앞에는 수로를 파서 배산임수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설에서 주택이나 건물을 지을 때 이상적으로 여기는 배치에 해당함)의 모양을 갖추어 복을 안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전합니다.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어간 그의 넋이나마 복을 받기를 바라는 후손들의 정성인 듯 합니다.

단종~!
어린 나이에 유배지에서의 삶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숙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비운의 왕으로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지내다 끝내는 17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억울하게 죽은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 참으로 슬픕니다. 이 슬픔을 금년에는 하늘도 함께하느라 하루종일 비를 뿌렸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렸고 찾아들었습니다.
후세에 의해 왕위가 복권되고 또 그의 얼이 깃든 영월의 장릉에서 한식날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1967년부터는 '단종문화제'를 통하여 슬픈 역사속의 주인공이 된 그의 넋을 기리는 장릉의 모습을 담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