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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교육

무수리같이 키운 우리딸, 공주가 된 사연



객지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딸, 기숙사 퇴실기간을 알려왔습니다. 딸이 기숙사를 비워야한다는 기간 중 휴일이 있긴 했으나 남편이 시간을 낼 수 없는 처지라
 "딸, 아빠는 그 때 시간이 안될것 같은데 어쩌면 좋겠니?"
 하고 물었더니, 
 "아빠, 나도 모르겠어."
뜻밖에도 딸의 태평스런 대답을 들은 남편이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대책을 세워야지."
 "......"
대답이 없는 딸, 이에 남편이
 "그럼 짐을 좀 빨리 빼면 어떨까? 필요한 것만 두고..."
 "알았어. 아빠 고마워"
퇴실기간에 앞선 휴일날, 남편이 딸의 기숙사로 가겠노라고 결론을 낸 후,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참 어이가 없어서... 지가 모르면 누가 안대..."
 "여보 왜 그래?"
 "기숙사 짐을 빼야한대. 그런데 시간이 안날 것 같다니까 모른대 글쎄."
 "택배로 보내라고 하지 그랬어."
 "......"
이에 남편은 대답이 없고, 저는 웃음이 났습니다.
 "ㅎㅎㅎ 여보, 이제 딸도 확실하게 당신 딸임을 입증하네."
 "뭐가?"
 "아빠의 처분을 기다리는 자세^^ 예전같으면 알아서 먼저 결론을 냈을 텐데... 우리딸 확실히 변하긴 했네.^^"
언짢은 남편 기분과는 달리, 저는 딸의 변화에 웃음을 흘렸습니다.

작년에는 기숙사 입실할 때만 직접 데려다 줬을 뿐, 퇴실할 때는 딸이 알아서 짐을 챙긴 후 택배로 보냈기 때문에, 남편은 금년에도 딸이 스스로 알아서 그렇게 할 줄 알았나 봅니다.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울딸, 자신이 해야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의견이 나오기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남편의 성격은 느긋한 편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성질 급한 사람이 먼저 의견을 낼 때까지 자신의 뜻은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늘 제가 먼저 북치고 장구치는 꼴이지요. 그리고 좋은 결과에 대한 칭찬은 남편이, 나머지는 제 몫이 되기에 섭한 기분을 맛볼 때가 많지요.

딸이 기숙사 퇴실을 알릴 때, 남편이 시간을 못 낼 것 같으면 택배로 보내라고 하면 될 것을... 울남편 절대로 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태파악을 한 딸이 먼저 택배로 보내겠노라고 알리게 되는데... 금년에는 울딸이 모르겠노라고 버틴 것입니다. 느긋함에 대한 부녀간의 기겨루기에서 남편이 진 것 같아 저는 웃음이 났던 것이고요.
 "여보, 우리 지난번에 애들 만나러 갔을 때, 딸이 변했다는 것 느끼지 않았어?"
 "뭐 별로..."
 "못 느꼈다구? 당신닮아 느긋했던 아들도 딸이 변했다고 혀를 내둘렀는데, 당신은 우리딸 행동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 못챘다구?"
 "어땠는데?"
 "당신도 봤잖아. 언행이 엄청 느려진 거."
 "글쎄..."
 "오죽하면 아들이 딸에게 'OO아, 너 말투 느린 거 알아? 그리고 행동도' 이런말을 했는데 못 들었어?"
 "들었어. 그냥 지들끼리 하는 소린 줄 알았지."
 "바로 그거야. 딸이 작년같지 않기에 왜 이렇게 변했나 싶어서 이런 저런 말을 시켜봤더니, 글쎄 남학생들 영향이 컸더라구."
 "어떻게?"
 "작년에는 여자반 남자반인 학과에 다녔고, 금년에는 남학생들이 많은 학과다 보니 몇 안되는 여학생들 수고를 덜어주는 흑기사 노릇을 남학생들이 해주나 봐. 우리딸이 그런 분위기에 아주 익숙해졌나 보던데..."
 "학교생활이랑 기숙사 퇴실과 무슨 상관있어?"
 "ㅎㅎㅎ 나는 상관이 있는 거 같은데... 딸이 변하긴 변했잖아. 작년 같으면 먼저 택배로 보낼께. 했을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잖아. 지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는 거지.^^"
 "......"

어릴 적부터 자립심이 강했던 딸은 자신이 해야할 일은 미루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작년에 진학한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고민끝에 반수생으로 학교와 학과를 바꾸어 진학한 딸은, 대학 신입생 시절을 두번 겪는 셈이지요.
금년에 진학한 학과에는 남학생들이 여학생보다 훨씬 많다보니, 학기초에 울딸 꽤 당황스런 일을 여러번 겪었답니다. 예를 들어 책걸상을 옮기는 일이라던지, 혹은 무슨 행사때 기념품을 나르는 일이라던지... 등등, 현장의 상황이 빨리 정리되기를 바라며 돕고자 나선 딸의 모습을 본 남학생들이 만류하며,
 "OO아,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으니까 가만히 있어. 힘자랑 하지 말고 우리가 알아서 할께."
 "가만 있으면 뭐해. 같이 하면 빨리 끝나잖아."
 "그래도 가만히 있어. 여학생들 중에 돕겠다고 나선 사람이 너 말고는 없잖아."
둘러보니 정말 여학생으로서는 딸 혼자서 돕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낯설어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비슷한 일을 여러번 겪다보니, 우리딸도 어느새 남학생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에 무관심해졌고, 그리고 몇 안되는 같은과 여학생을 보호하려는 남학생들의 보호를 받는 분위기에 익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엄마, 내가 우리집에서 무수리같이 자랐다는 거 우리과생이 다 알아.^^"
 "어쩌라구, 그래서 너 공주 대접 받으니 좋던?"
 "응, 기분 좋던데, 첨엔 적응 안돼 좀 이상하긴 했지만.^^"

집안일도 잘 거들고 심부름도 잘하며 재빨랐던 우리딸, 무수리같았던 자신의 적극적인 행동을 제재하는 학과 남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주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