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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여행

친정엄마와 함께 다녀온 해인사 장경판전

결혼후 처음으로?
아니 난생처음으로 친정엄마와 단둘만의 나들이로 합천 해인사를 다녀왔습니다.
성인대 성인, 여자대 여자로...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기회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더구나 제가 어려서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마가 몸이 불편해서 제가 돌봐야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동등한 입장으로, 집을 떠나 그리고 둘만의 시간으로 함께하면서 잘 알지 못했던 엄마의 속내를 알수 있었던 점이 무엇보다 감사했습니다.
엄마에게 딸이 저 하나인 관계로 엄마를 다 안다고 생각했던 저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런 기회를 자주 갖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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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도착한 곳. 가야산 해인사 입구의 이 건물은 27년 전(결혼전 친구들과 다녀감) 모습 그대로여서 익숙해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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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을 올라 공터였던 자리에는 새로 지은 박물관이 들어서 있었는데, 입장료를 내고 관람한 실내(사진촬영금지)는 불교문화와 스님에 관련된 문화재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사진촬영이 가능한 곳에 팔만대장경판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으며, 목판인쇄 체험장소도 마련되어 있어서 초등생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가야산과 해인사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다리는 여전히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었고, 친구들과 찾았던 계곡의 시원한 물흐름을 보면서 옛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자연을 벗삼아 천천히 걸으며 엄마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그간에 하지 않았던, 어쩌면 조심스러웠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숲길을 걸으며 상쾌함에 흠뻑 빠져 걷노라면, 해인사 입구 비석거리를 만납니다. 해인사 사적비를 비롯한 20여 기의 공덕비가 안치되어 있는 언덕에는 자운, 성철, 일타 스님의 행적비와 사리탑을 모셔놓은 부도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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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장군 팔만대장경 수호 공적비
예전에 없었던 이 공적비는 2002년 6월에 故 김영환 장군의 공적을 기리며 세운 것입니다.
6.25전쟁시 비행단 참모장으로 편대를 이끌고 가야산에 은신해 있던 인민군 1개 대대를 섬멸하기 위해 나섰던 김장군은 이들의 주둔지인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미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가야산 능선에 폭탄을 투하하여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보존했기에 오늘날의 해인사와 팔만대장경판이 유네스코에 오를 수 있었음을 높이 기리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공군조종사의 상징인 '빨간마후라'를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도 유명한 분입니다.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고 보존하고자 했던 분의 지혜로운 처사에 감동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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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젊은시절 친구들과 해인사를 방문했을 땐 없었던 자랑스런 표석이 해인사 입구에 당간지주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늙은 당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지 않으시다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수 있었기에 거부하시는 엄마와 함께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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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지주는 불, 보살의 위신력과 공덕을 표시한 깃발을 매어 달기 위해 기둥을 세우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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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큰 절에 들어설 때마다 처음 만나는 것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문을 지탱하고 있는 건축구조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는데, 해인사의 일주문은 홍하문이라고도 하며, 그 소박한 아름다움과 주위 경치와의 어우러짐이 일품인 까닭에 일주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름이 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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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문으로 가는 길이 아늑하고 멋져서 담았습니다.
 양쪽에는 키가 큰 노목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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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눈길을 끄는 나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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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은, 신라 제 40대 애장왕 3년 서기 802년,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의 기도로 애장황후의 난치병이 완치되자 왕이 은덕에 보답코자 법당과 승료등 많은 가람을 헌공하여 해인사를 창건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식수한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느티나무는 1200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해인사와 더불어 성장하여 오다가 1945년에 수령을 다해 고사하고 지금은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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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문
이 안에는 돌이나 나무 등으로 조각되거나 탱화에 그려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젠 무서워하지 않지만... 저 어린시절에 사찰마다 이같은 곳이 있음이 무척 싫었습니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곳을 통과하는 사람을 째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어른손을 꽉 잡고 빨리 지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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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모든 건물 가운데에서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구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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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
사찰의 경내에서 마당을 내려다 보았을 때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왼쪽을 체로 오른쪽을 용으로 말하는 화엄의 사상에 따라 설치 된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북과 종을 치는 법고식을 볼수 있었습니다. 북소리와 더불어 북을 치시는 스님의 포즈가 예사롭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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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짧은 어린이가 물을 받기엔 거리가 멀어 불편해 보였던 범종각 앞에 있는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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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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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광전
어떤 주신을 모시느냐에 따라 이름을 달리 하는 대웅전 같은곳.
대적광전 뒤, 해인사의 제일 높은 위치에 장경판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경판전은 대장경을 모신 건물로, 이 형국은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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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사대

신라의 문학가이자 충신이었던 고운 최치원선생이 거문고를 튕기며 기울어가는 신라왕조에 대한 시름을 달래던 곳으로, 그때에 거꾸로 꽂아둔 전나무 지팡이가 지금까지 살아서 거목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지가 모두 아래로 처져 거꾸로 자라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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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58장의 대장경판에 새긴 글자수가 5천 2백만자나 되지만 내용상 오자.탈자도 하나없이 고르고 정밀함을 뽐내며, 현존하는 대장경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완벽한 내용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보관하는 건물인 장경판전을 둘러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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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찰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대웅전이 자리해 있지만, 해인사에서는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한 장경판전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음이 이색적입니다. 계단이 매우 가파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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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판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고,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인 장경판전은 조선시대에 건립되었다는 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던 학창시절이 생각납니다.^^
이 건물을 조선시대에 짓기전에는 어디에 보관을 했지? 그리고 숭불시대에 새겼던 대장경판을, 숭유억불시대였던 조선시대에 이 대장경판을 잘 보관하기 위해 건물을 지었다는 점도 의아해서 역사시간에 질문을 했었는데...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시는 분 있으면 누가 좀 갈켜주세요.

부처님의 보살핌때문인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 건물은 한번도 화재나 전란등의 피해를 입지 않고 팔만대장경판을 고스란히 잘 보관하고 있다는 점이 참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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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긴 건물 두동이 남쪽과 북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앞에 그러니까 남쪽에 있는 수다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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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처마만 보이는 건물은 남쪽건물인 수다라전이며 오른쪽 건물은 북쪽에 자리잡은 법보전입니다. 그리고 사진으로 중앙에 보이는 작은 건물이 동서방향으로 양쪽에 있는데 동.서간판전이라 하며, 건물 네동이 중앙에 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직사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충 휘리릭 둘러봤었는데, 이번에는 세계문화유산이 된 이유를 떠올리며 꼼꼼하게 보게 되더군요.^^

오른쪽 표지 보입니까?
사진촬영금지는 건물 내부에 보관된 대장경판을 찍지 말라는 뜻인 줄 알고 마당에서 건물만 담았는데... 알고보니 이곳 자체가 촬영금지구역이었습니다. 무식하게 뜻을 잘못 이해한 저의 행동이 부끄러웠지만 이왕에 담은거 제 블로그에 옮깁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울때만 해도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판의 가치나 우수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에 젊은시절 친구들과 돌아볼때 건성으로 보았던 것을 관람하노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더구나 대장경판에 새긴 글자는 목판임에도 불구하고 한장도 뒤틀림없이 반듯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눈길이 장경판전에 쏠렸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기에 비와 눈이 내리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통풍이 그토록 잘 될수 있단 말인가.
창을 보십시요.
수다라전과 법보전의 앞면과 뒷면의 창크기가 다릅니다. 반대로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아주 과학적인 통풍방법으로 오늘날에도 따라가기 어려운 우리 선조들의 슬기를 보여주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받침돌 앞면에는 구멍이 나 있으며, 우리눈으로는 확인할수 없지만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된 내부바닥은 본디 토질자체도 좋은데 그 땅에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어 장마철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했으며 그 기능을 원할하게 하려고 판전의 창문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지어진 건물에서 대장경판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라고 평가받은 것입니다.
가치를 모르고 관람에 임했다면 '무슨 헛간같이 생겼네' 하고 지나칠 것처럼 허름해 보일 정도로 꾸밈이 없어 보이던 장경판전은 단청의 화려한 사찰과는 아주 대조적인 느낌을 풍기며, 소박하다 못해 초라해 보일지도 모릅니다만 이 모든 것이 선조들의 과학적인 지혜로운 방법으로 지어졌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쉰을 바라보는 아줌마가 된 벗들과 함께했던 가야산과 해인사를 거친 젊은날의 추억을 더듬어보면서, 동시에 엄마와 함께한 단둘만의 나들이로 새로운 추억을 덧칠한 뜻깊은 장소로 해인사와 장경판전을 새로이 기억창고에 저장합니다.